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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정상에서 뒤돌아 보는 지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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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남대문 시장 김치찌개 백반 66년,배곯으며 힘겹게 얻은 제대증을 손에 쥐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직업을 구할때였다. 그날도 서울역 근처에서 면담을 끝내고 터덜 거리며 걸어 나올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길가 식당을 두리번 거리며 음식 값을 보니, 내 주머니 사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소문으로만 듣던 음식값이 싸다는 남대문시장 밥집이 즐비한 곳을 찾아갔다. 소문대로 김치 찌개 백반이 50원이었다. 수증기로 찐 밥 한 사발, 김치 찌개 한공기, 김 몇쪽이 메뉴의 전부였다. 수증기로 찐 밥을 처음 먹어본 맛은 밥이 되려다 만 설익은 밥맛이었다. 설익은 밥을 한수저 입에 떠넣고 김치찌게 몇쪽 을 젓갈로 집어 입에 넣고 선밥과 함께 씹어 먹자, 김치찌개의 시큼한맛이 선밥맛을 감싸며 어우러져 황홀 한 감칠맛으로 ..
영원한 고향 김포 1950년 여름 초딩2년때 6.25 전쟁이 났다.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몇달 견디지 못하고 전쟁전 외할머니 친정이 있는 김포 고천 향산리에 부친이 구입해 두었든 정미소와 논이 있어 그곳으로 가는길은 끝도 없이 멀고먼 황톳길이었다. 나이들어 그때를 생각해보니 찌는 더위에 이마에서 쏫아지는 땀방울를 손으로 씻어 내며 7살 어린 소년이 종종걸음으로 어른들을 쫏아가기란 정말 힘에 부치고 힘들었다. 어딘지 이름 모르는 곳에 이르렀을때 인민군이 길을 막고 어머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어머님은 이들에게 피난살이가 너무 힘들어 집으로 돌아간다고 대답하자 바지 바깥 양쪽에 붉은 줄이 길게 처진 군복을 입은 인민군 장교 인듯 한자가, 정말 잘생각 하셨소, 고생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면서 길을 열어주..
60년대 의정부 풍경 60년대 서울 시내를 누비든 작은 버스가 있었는데 그 버스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지 않는다.자판을 두드려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잊혀저 가는 것들을 다시 찾아내어 한편의 글을 완성하며 치매를 예방하기 위한 이노병의 노력은 몇일전 부터 60년대 사진의 작은 버스 이름을 찾아 기억속을 헤메었으나 오늘 아침 이순간도 그 작은 버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내지 못했다. 몇일을 기억속의 수많은 계곡을 오르고 내리고 샅샅이 뒤져도 도무지 저 작은 버스의 이름은 찾아 내지 못하고 지처 숨을 헐덕이다가 커피 한잔 끓여 마신후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자판을 두드리며 저버스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다시 기억의 계곡을 뒤지기 시작한다. 60년대 서울과 지방의 거리를 누비며 시..
61년, 5.16 혁명의 해 김지미와 최무룡 61년 5.16혁명이 일어난 해 이노병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결국 일어날 것이 일어났다고 중얼거리며 일하러 갔다가 저녁에 야간 대학으로 터벅 터벅 걸어가는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서민들은 누구나 할것 없이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봄이 오면 보리고개가 농촌의 가난한 농부들을 괴렵혔고, 도시에 사는 서민들은 미국에서 원조해주는 잉여물자인 밀을 제분한 밀가루로 연명을 하고 있을 때였다.그때를 회상하며 검색을 하자 61년 주한 미군이 선전용으로 제작한 주한미군에 배속된 카투사들 대한 선전용 영상물을 제작했다. 제작 시기가 5.16 혁명 전인지 후인지는 검색을 하지 않아 알수가 없으나 최무룡은 카투사 역으로 김지미와 함께 출연햇다. 최무룡과 김..
54년 주한미군 위문 공연 온 마를린 몬로 까마귀 날자 뭣떨어 진다는 속담 처럼 치매 예방위해 열심히 자판두들기며 블러그에 열중하려고 마음을 먹고 자판두들기 준비를 끝내자 카카오 써비스가 화재로 완전 불통이 되여 버렸다. 그 몇일 사이 2007년부터 20016년까지 사용하고 처박아 두었든 랩탑을 꺼냈다. 이랩탑은 마이크로쏘프트가 지원중단한 윈도7이 깔려 있었다. 말웨어가 덕지덕지 쌓여있어 거의 사용이 불가했다. 우선 수퍼안티스파이워어를 다운받아 깔고 청소를 하고 윈도 7대신 크롬을 다운받아 설치 하자 랩탑은 기지개를 켜고 다시 깨어 났다. 현재 쓰는 랩탑과 스피드를 비교해보니 별차이가 없었다. 우선 사진을 찾아보니 그동안 한국다녀 왔을때 사진들이 반갑게 이노병을 맞으며 그동안 왜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냐며 난리들을 쳤다. 이런사진들을 위해 사진파일..
세월의 무상함이여 20대 초반 징집 영장 받고 입대해 신병교육후 대전육군통신학교에서 4개월반 배고픔과 선임병들의 구타에 시달렸든 시간들은 쌍팔년(1955년) 휴전후에 입대해 고생한 선배들의 고생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래 도 내가 한국군에서 격은 배고품의 고통은 58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가끔 자다가 악몽에 시달린다. 이만갑에서 탈북민들이 북한에서 격은 그 배고픔을 이노병은 한국군대에서 격었다. 배곱음의 고통은 격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고통의 끝이 얼마나 깊고 큰지. 절대로 알수도 이해 할수도 없는 인간이 느끼는 고통중 가장 잔인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양산읍에 내려가면 이노병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가 나에게 영원히 머무를수 있는 나이가 언제냐고 묻는 다면 이노병은 사진의 30대가 영원히 머물고 싶은 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