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여름 초딩2년때 6.25 전쟁이 났다.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몇달 견디지 못하고 전쟁전 외할머니 친정이 있는 김포
고천 향산리에 부친이 구입해 두었든 정미소와 논이 있어 그곳으로 가는길은 끝도 없이 멀고먼 황톳길이었다. 나이들어 그때를 생각해보니 찌는 더위에 이마에서 쏫아지는 땀방울를 손으로 씻어 내며 7살 어린 소년이 종종걸음으로 어른들을 쫏아가기란 정말 힘에 부치고 힘들었다. 어딘지 이름 모르는 곳에 이르렀을때 인민군이 길을 막고 어머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어머님은 이들에게 피난살이가 너무 힘들어 집으로 돌아간다고 대답하자 바지 바깥 양쪽에 붉은 줄이 길게 처진 군복을 입은 인민군 장교 인듯 한자가, 정말 잘생각 하셨소, 고생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면서 길을 열어주었다. 인민군과 거리가 멀어지자 어머님은 내이름을 부르시며, 이전쟁에서 지면 빨갱이들의 세상이 되는데 그때는 말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벼와 좁쌀까지 세어서 빨갱이들이 세금으로 거두어 들인다는 소문이 나돈 다고 하셨다.
나이들어 그 끝도 없이 멀고 먼 황톳길 피난길을 종종 걸음으로 걸었든 때를 생각해보니, 그 황톳 길은 한 하운님의 시 전라도 길중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떠올리게 한다.
한여름 더위와 싸우며 김포 고천읍 향산리 정미소에 달린 집에 도착하자 북한의 김일성은 신통하게 전쟁중에도 북한에서 전기를 남한으로 보내 정미소는 몇달간 운영이 되다가 북한이 전기를 끊는 순간 정미소는 영업이 중단되였다.
우리집은 부친의 운수 사업으로 손해를 본후 정미소를 정리하고 56년 이노병을 어머님 와삼촌댁애 남겨두고 영들포로 돌아갔다. 그때 이노병은 김포중 2학년이었다. 57년 김포중학교를 졸업후 이노병도 영등포로 돌아가 가족과 합류 했다.
2년동안 이노병이 가족과 떨어져 어머님의 외삼촌댁에서 중학교를 다닐때, 어머님의 외숙모 와 어머님 4촌 동생들은 나를 정말 친손주나 친조카처럼 잘 대해 주고 보살펴 주었다. 이렇게 고마운 어머님의 두분 사촌동생들을 이달초 전화로 통화를 할수 있었다. 정말 반가웠다. 이두분은 나에게는 친이모나 다름 없이 고마운 분들이다.
7년간 어린시절 잔뼈가 자란 김포 고천 향산리는 나의 영원한 고향이다. 십여분만 북쪽으로 걸어가면 한강에
서 수영과 낙시를 할수 있는 곳이다. 여름 방학이면 한강은 이노병에게 놀이터가 되여 주었다. 그런 한적한 시골
동네가 개발이 되여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며 아래 사진의 모습은 영원이 사라졌다.
고향을 갈때 마다 이노병은 고천 향산리에 들러 회상을 하며 동네를 한바퀴 돌며 사진을 찍었다.
땅과 집을 팔고 떠난 자리는 페허가 되였다.
이집이 어머님 외삼촌 집 안채였다. ㅁ자 집이었으나 바같채는 헐어버려 없어지고 안채만 남았다.
추억이 서린 집으로 이노병은 바같채 사랑방에서 2년을 살았다.
이집은 어머님 외삼촌댁 왼쪽 집으로 집주인은 반공포로 한씨로 부친의 정미소에서 일하다 결혼해
독립해 나갔다.
향산리에서 북쪽 한강 건너 일산의 아파트가 보인다.
상향산리 마을회관
이집이 누구의 집인지 사진을 찍을때 알고 찍었으나 지금은 누구의 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시멘트 터가 부친의 정미소가 있었든 터다. 향산리를 걸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정미소
와 그 뒤에 살림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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