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흉노족의 후손?
흉노의 전성기는 묵특(기원전 209∼174)이 강성기에 초원의 제 유목민족을 정복하고 한반도 북부에서 시베리아 바이칼호, 티벳으로 영토를 확장한 시기이며 60여 년간 한나라로 부터 조공을 받았다. 한나라는 유럽에 진출한 흉노가 로마로부터 매년 조공을 받았듯이 주종의 관계를 유지하다가 북방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한 무제가 서기 69년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전술로 흉노족들을 서로 이간질시킨다. 북방민족은 서로 싸우며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북방민족인 흉노의 서진과 동진, 남진이 시작되어 한반도 북부 만주지역에 정착했든 흉노가 한반도로 유입한 시기라고 할 수 있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 남아있든 흉노가 4세기에 5년간 계속된 냉해로 한반도 북부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흉노집단의 일부라고 추측할 수 있다. 북한과 만주지방에서 출토된 흉노의 청동솥은 그 지역에 흉노가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장천 고구려 고분 벽화>
고조선이 멸망(BC 108)하고 고구려(BC 63)를 세운 예맥족은 고조선의 유민들이며 대표적인 고조선의 기층부족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기둥을 받치고 있는 역사는 말갈인으로 전형적인 아이누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 외에 고구려 경내에서 살고 있던 흉노와 선비족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모습이 같기 때문일 것이며, 고구려가 다민족 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김내현 단국대 교수가 선비, 흉노, 말갈족들을 한민족에 포함시켜야 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위치는 <삼국지위지동이전>의 진한 지방이며, 진나라 때 만리장성의 노역을 피해온 진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지방이다. 신라의 옛 국명은 사로국이다. 삼국사기의 신라(BC 57. 건국신화 생략) 탈해왕 9년(서기 65) 시림(후대에 계림으로 개칭)에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나타나 탈해왕이 길렀다는 고사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가 이미 기원전에 신라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신라에서 왕이라는 칭호가 아닌 이사금, 마립간과 같은 북방초원민족이 지배자를 호칭하는 용어를 사용한 기록은 초기 신라의 지배자들도 기원전에 남하한 북방유목민이라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자료 참고1)
김알지의 후손 미추왕이 262년에 왕위에 오르면서 석씨와 박씨계의 왕계는 끊어지며 김씨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이어갔다는 사실은 김씨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신라의 통치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사의 미스터리로 대변되는 신라 고분 천마총 및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황남대총 그리고 금령총 옆에 있는 식령총이 한결같이 모두가 다 5세기말-6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다. 이 사실은 신라의 고분군이 갑자기 출현한 이유를 대변한다. 고구려 고국원왕 12년(서기 342) 선비족인 모용황이 환도성을 침공해 고국원왕의 부친인 미천왕의 묘를 파내 시신과 왕족 외 만여 명의 포로를 잡아간 사건이 발생했다. 고구려를 침공한 선비족의 반은 흉노로 구성되었고 이때 이탈한 흉노가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와 신라왕권을 찬탈하고 신라고분을 건설하며 가야지방으로 내려가 가야를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삼국사기는 신라 김씨를 모용씨라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4세기에 일단의 흉노가 대거 남하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가 없으나 그들이 단시일 내에 금관이 발굴된 고분군을 조성했다는 설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은 왕의 무덤이 확실하며, 4세기 중반에 도래한 흉노가 고분군을 건설했다면 그 집단에서 5명의 왕이 100여 년간 왕위에 등극하고 사망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왕의 능묘 한 개를 만들려면 출토된 유물로 봐서 막대한 재정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발굴된 다섯 개의 능묘를 100여년에 걸쳐 일시에 조성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방금 도래한 흉노 집단으로서 자신들의 직계조상인 아닌 피장자들을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재정을 소비해 가면서 왕의 능묘를 건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흉노가 한반도에 도래해서 고분군을 건설한 기간을 유추하는 방법으로 미주한인 이민의 예를 들어 보면 좋은 비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03년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30여일 걸려서 하와이와 맥시코로 이주한 한인은 3천여 명에 불과 했으나 한국전쟁후 미국으로 이민한 동포들은 6,000 여마일 을 비행기를 타고 10여 시간 걸려서 미국에 도착했다.
동포사회에서 한국인 공동묘지가 따로 건설되고 봉분묘를 만들기 시작한 시간은 미주동포가 100만을 넘어서는 이민역사 백년전후다. 한국말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 커뮤니티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한국식의 봉문묘를 만들 수 있었고 또 동포들이 두고 온 장례문화를 미국에서 재현할 수 있었다.
말을 타고 하루 100km를 여행할 수 있는 시기에 신라지역에 도착해 150여기의 고분군을 남긴 우리 선조인 흉노족 김알지가 서기 65년에 신라에 등장하고 그의 후손인 미추왕이 서기 262년에 왕위에 올라 5세기말과 6세기에 걸쳐 그들이 가지고온 스키타이식의 적석목곽분묘를 축조한 시기는 무려 4백여 년이나 걸렸다. 그들도 미국으로 이주한 미주동포들과 같이 그들이 가지고온 적석목곽묘를 축조할 때 토착민 인구의 20-30% 정도의 흉노 문화를 가진 공동체가 없었다면 신라 고분군은 탄생할 수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라 경주에 흉노족의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은 고분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과 마구용품, 생활용품, 유리공예품들을 만들며 제작할 수 있는 장인들이 공동체내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 토착민이 중앙아시아까지 가서 북방문화를 들여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김알지의 후손으로 최초로 신라 왕위에 오른 미추왕의 묘라고 추측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내추측은 김알지의 후손의 위치에서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KBS 방송에서 제작한 역사스페셜에서 삼국 통일 후 일본에서 신라에 주문한 물품 품목에 비단 외에 양탄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라에 유목민이 거주하며 양탄자의 재료가 되는 양이나 낙타를 길렀고, 또 양이나 낙타의 털을 이용해서 양탄자를 만들 수 있는 기능공이 있었다는 확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다.
유리로 만든 공예품도 신라에서 제조했다는 사실은 80년대 초에 방송에서 유리공예품을 만들었던 지역을 찾아내고 발견된 유리파편과 고분에서 나온 유리제품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신라지역에서도 유리제품이 생산되었다는 사실도 이미 밝혀졌다. 발굴된 신라 고분군의 특징은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밝혀줄 만한 기록을 묘에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5세기 말에 조성된 고분들은 신라에서 한문을 사용하면서 왜 피장자의 신분을 남기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흉노의 침공으로 그들의 장례문화 영향을 받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유럽의 장례 문화에서 관을 하관할 때, 따라온 문상객들은 자리를 피하며 친족 몇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놓은 땅에 관을 하관하고 묻는다. 그 이유는 피장자가 묻히는 곳이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스키타이 매장문화를 계승한 흉노는 사망한 지도자나 왕을 매장한 후 후일에 있을지도 모를, 묘를 파헤치는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피장자의 신분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고 추측 할 수가 있다. 신라 고분도 전통적인 흉노의 장례문화에 따라 묘를 조성했기 때문에 피장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아틸라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추정만 할뿐)모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인 성씨중 금이라는 뜻의 김씨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흉노가 남긴 자취이며,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대왕이 자신을 흉노의 후손이라고 기록을 남긴 것은 고대 한반도에 흉노의 존재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들이다.
[참고1] 김태식기자 정리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국립경주박물관 발굴 결과 신라 건국과 밀접한 기원전 1세기경 각종 화려한 유물을 출토한 경주 조양동 유적 발굴보고서가 늦어도 올 연말쯤에는 나올 전망이다.
최근 취임한 지건길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6일 "무슨 일이 있어도 조양동 발굴보고서를 올해 안에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양동 유적은 지난 79년 6월 이곳에 거주하는 한 개인의 집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몇 점의 토기가 발굴된 것을 계기로 경주박물관이 82년까지 4차례에 걸친 발굴을 벌인 결과 그 중심연대가 삼국사기가 기록한 신라건국연대(BC 57년)와 대체로 일치하는 기원전 1세기경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물 중에는 무덤으로는 토광묘와 목곽묘가 섞인 특이한 무덤이 있는가 하면 옹관묘, 목관묘도 확인됐고 더구나 이곳에서는 말 재갈을 비롯한 다량의 철기와 중국 전한(前漢) 및 왕망(王莽)의 신(新)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명백한 구리거울 등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이 중에서 특히 목곽묘와 목관묘는 기원후 4,5세기경 어느 날 갑자기 경주지역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았던 대형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의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당시는 물론이려니와 지금도 한국고대사학계 및 고고학자 대다수는 한국고대사말살에 혈안이 됐던 일제식민사 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삼국사기가 기록한 신라건국연대를 조작이라 몰아붙이면서 신라의 실질적인 건국을 대형 적석목관분의 출현과 함께 하는 4세기 중, 후반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조양동 유적에서는 이 유적의 축조연대를 명확히 알려주는 전한의 구리거울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더구나 이들과 같이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이미 기원전 1세기경 경주지역 문화가 고도의 문명단계로 들어섰음을 입증해 줬다는 점에서 삼국사기가 BC 57년이라고 기록한 신라건국 연대가 마구잡이로 끌어올려진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따라서 이 유적은 마치 풍납토성이 좀처럼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초기백제사를 새롭게 쓰게 하고 있듯이 일제식민사학자들과 이병도 이후 국내 고대사 학계가 그 존재를 말살했던 초기신라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신라판 풍납토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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