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현재 연재 하고 있는 훈족의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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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74년 바람과 같이 유럽 다뉴강(현 항가리) 초원에 진출한 훈족(흉노)에 대한
유럽에 진출한 훈족에 대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많이 남겼으며 그기록중에서 훈족은
이들은 유럽과 중근동을 지배하든 대제국 로마와 싸워 그들을 괴롭히며 로마로
로마의 어린이도 훈족이 온다면 울음울 그치게 할 정도로 전쟁터에 나가서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에서 독일 연출가인 옌스
미국에서 제작된 훈족 다큐 Atilla, The king of Babarian 은 메모해둔 자료가
두편의 다큐를 비교해 보면,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는 철저하게 유물
그 다큐는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다큐를 본후 나는 훈족의 자료를 찾아 오늘 이
신라와 한반도에 정착한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진출했을지도
스키타이 병사들은 죽은 적병의 두피를 벗겨 양손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필요할때 마다 수건처럼 사용했다. 그들 사이에서 두피를 많이 가진자가 존경을 받고 두피조각을 여러개 꾀매서 큰 두피수건을 만들기도했다. 적병의 머리를 잘라 두개골 윘쪽부분 안쪽을 금판으로 입히고 가죽으로 밖을 씨워 컵으로 사용했다. 집안에 수많은 두개골을 금장식품과 함께 진열해서 찾아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자신의 용맹을 과시했다.
스키타이민족의 신화는 제우스의(Zeus) 아들 타기타우스(Targitaus)가 그들의 조상이라고 전해져오지만, 문자가 없는 그들의 역사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우리가 알고있는 독특한 스키타이 양식의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알려졌다. 멜유코바(A.I.Melukiova) 는 스키타이 인들이 기원전 2천년부터 기원전 7세기 사이에 몇차례에 걸처서 볼가강-우랄 초원을 거처서 흑해연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고있다.
스키타이인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7세기에 앗씨리아와 키메르인(Cimerians)에 대항한 동맹국으로 알려져있고, 그결과 키메르인들은 살든영토를 잃고 스키타이인들에게 남쪽으로 쫓겨갔다. 기원전 674년 스키타이 파타투아왕은(Partatua)아씨라아 공주와 결혼으로 아씨라와 동맹관계를 굳히며 그들과 함께 카스피해의 메도스(Medos)지역을 정복했다. 메도스인들은 후에 스키타이인들을 서아시아지역에서 격퇴해 이들은 다시 폰티악(Pontiac) 초원으로쫏겨났다.
스키타이민족이 어느인종에 기원을 두고있는지, 그들의 문화를 추적한 결과 그들의 문화는 인도북부[현북부 파키스탄 스르브나야(Srubnaya)]지방과 연계 되였다는 사실과 해르도투스가 남긴 스키타이인의 언어 기록중 'pata" 죽이다, 'spou' 눈,arima' 하나, 'oior' 남자 등이 남아있어 언어학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인도-유럽어 어군 이전의 고대 언어로 분류하고 있어 이들의 출발지가 어디인지를 거의 정확하게 규명 할 수 있다.
유럽과 중동에서 말을 전투에 사용할 수있는 말타는 기술을 전파시킨 민족은 스키타인들이며 유럽과 중동제국에서 말탄 사람이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등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훈족이 유럽에서 몰락한 6세기 부터였다. 6세기 이전 영화에서 등자가 있는 말을 타고 유럽인들이 싸우는 장면은 역사를 무시하는 허구라는 사실을 알수있다.
스키타이민족과 전쟁을 한 다리우스 대왕이 관찰한 일화는 스키타이인의 한 단면을 볼수 있는 장면이다. 한참 전쟁을 하는 중, 스키타이 병사들은 전쟁터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토기를 가끔씩 훔처보기 시작하다가 스키타이 병사들은 잽싸게 전쟁터를 벗어나 토끼사냥을 했다.다리우스대왕이 스키타이 전사들의 행위를 이해 할 수 없는것 처럼, 현대문명인인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도 스키타이인들의 그런 행위는 이해 하기가 힘들다.
이들이 남부 소련지방과 알타이 지역에 남긴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이들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초원에서 활동적으로 살았든 이들이 남긴 짐승을 대상으로한 예술과 말에 대한 사랑을 알수있게 되였다. 야만족으로 무시했든 특이한 이민족에게서 문명인인 우리는 바지와 승마기술을 전수 받았다.
BC 51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7십만의 대군으로 다뉴브강을 건너 소련의 초원으로 진격해 스키타이 정복길에 나섰다. 이를 맞은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작전을 사용하며 페르시아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계속 후퇴하는 이들에게 다리우스대왕이 전투를 독촉하자 이들은 이렇게 회답했다, 우리가 후퇴를 하며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평화시의 평상적인 생활 방식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집과 재산이 있는 마을도 없고 또 경작할 농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전쟁으로 모두 잃을 것이라는 공포에 대왕의 군대와 대항해 싸울지도 모릅니다. 그래나 아무것도 잃을것이 없는 우리는 대왕의 군대와 전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리우스대왕에게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생각해보니 스키타이인과 전쟁으로 적에게서 얻을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령할 도시도, 건물도, 약탈할 아무것도 없었고 그곳에는 끝없이 넓은 지평선만 보이는 초원밖에 없었다. 다리우스대왕은 철군외에 다른 선댁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철군하는 대왕의 군대에 스키타이군대는 다뉴브강까지 따라 가면서 대왕을 괴롭혔다. 그일이 있은후 다리우스 대왕은 다시는 다뉴브강을 건너 북쪽 초원으로 스키타이 정벌을 포기해 결국 승리는 스키타이인들에게로 돌아갔다.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는 자는 망하고, 초원에서 끝없이 이동하는 자가 승리 한다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의 믿음은 스키타이민족에서 유래한 말이 틀림 없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스키타이민족은 흑해초원 북쪽부터 흑해, 돈강(Azov해로 흘러 들어가는 러시아 중부의 강)동쪽 부터 서쪽 다뉴부강까지 차지했다. 스키타이 부족중 최고의 위치는 지배층에 속하는 부족이며, 다음이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 최하위층이 농경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이들은 지배부족과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다.(사진 융성기의 스키타이 영역, 노란색)
스키타이민족의 융성기는 기원전 4세기~3세기초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발전에 최전성기였다. 수많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이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인 흑해연안 카맨스코 고로다스케 (Kamenskoe Gorodishche) 지역에 정책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인 기원원 339년 스키타이왕 아테아스(Athesas)는 스키타이 제부족을 통합해서 영토를 확장해 트레시안(Tracian)국경인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아태아스왕은 나이 90에 마케도니아의 필립공(Philip, 그리스의 정복자 알랙산더 대왕의 부친)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스키타이 왕국은 그의 죽음에도 부강한 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3세기 말 서쪽으로 부터 처들어오는 켈트(Celt)족과 트레시안(Tracian)족, 동쪽에서 처들어오는 사마시안(Samathians)족에게 밀려 스키타이인들은 이들에게 흡수되며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2, 스키타이 민족의 생활과 풍습
스키타이인의 가족구성은 1부 다처제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이
스키타이 여자들은 별다은 권한없이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사는 존재에 불과했다. 스키타
물고기와 야생의 짐승이 풍부한 이들에게 양식은 항상 풍부했다.이들의 기본식품으로는
해르도투스가 본 스키타이인들은 열정적인 모습으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사진출처-김성모님
필자주1,위사진 설명에서 말탄 사람이 아랍인이라고 했으나 그는 해르도투스가 설명한 스키타이인이다. 앉아있는 사람은 여성이 아닌 남장한 무당(한국의 남자박수 무당)을 만나고 있는 장면이다. 말에 달려있는 곡옥은 신라의 곡옥과 같은 형태로 다산을 뜻하며 그리스에서 스키타이인들이 몽골초원에서 유목민에게 전해진 스키타이 문화가 신라경주 까지 전파되였음을 알수있다.
말타고 있는 사람이 스키타이인이라는 확증은 그가 입고 있는 하의가 바지여서 알타이지방 까지 진출한 스키타인이라고 고증할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스키타이인들이 세계 최초로 말을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필자주2, 왼쪽은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무용수들이 입은 바지는 스키타이 문화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른쪽 고구려 각저총 씨름도에 등장한 인물에서 보이는 수염기른 인물은 이랍인이라고 설명되고 있으나 필자의 생각은 스키타이민족이 고구려까지 진출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47년 2천년전의 스키타이인 묘지에서 발굴된 그들의 시신에서 굽이 달린 부드러운
스키타이인들은 왕이 사망햇을때 시위적인 애도의 슬픈행위는 장기긴 계속되였다. 모
이것으로 왕의 장례식이 끝난것이 아니다. 왕이 죽은지 일년후에 왕을 가까이서
스키타이인의 문화는 기원전 1,000 년전에 이미 중국의 북쪽 유목민에게까지
스키타이인들이 번성기에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해서 황금광이 많았든 그지역에
금으로 만든 혁대와 장식품 및 수많은 금장신구, 금관 같은 장식품은 스키타이
1세기 경에 제작된 아프가니스탄 황금의 계곡에서 발굴된 금관
신라금관과 아프가니스탄 금관은 스키타이문화의 산물이다. 지구상에서 면류관이 아닌 금관을 제작한 국가는 한국과 아프가니스탄 두나라 외에 없다.
헤르도투스(c.480-c.429).인류최초의 그리스 사가로 많은 사서를 남겻슴. 참고2 다리우스(Darius III) 페르시아 대왕 BC 331년, 그리스의 정복자 알랙산대 대왕과 가구가멜라(Gaugamela) 대전에서
디오도루스 (Diodorus) 이태리 반도 남단섬 시실리 출생의 그리스 사가,40여권의 저서를 남긴그는 알랙산
3, 훈(흉노)가 서유럽으로 이동한 이유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이동을 하게된 직접적인 원인은 중앙아시아와 극동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흉노) 다큐와 달리 독일방송에서 제작한 훈족추적 다큐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인 기마인물상(국보 91호)에서 말잔 경주고분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삼각모와 말잔등에 실려있는 동복(청동솟)은 훈(흉노)의 동복과 같은 형태다.
기마인물은 편두를 했다고 보고 있으며,미스테리 처럼 남아있는 금관의 직경이 작은이유는 신라왕들이 편두를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기마인물상의 발이 등자를 사용하고 있다. 훈족이 사용하 든 등자와 같은 형태의 등자는 유럽인들에게는 신병기였다. 등자는 훈족이 유럽을 유린할 수있는 가장강력한 무기였다.
동복은 유목민의 상징적인 유물로 스키타이 식과 흉노식 두가지 형태가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였고 북부중국 초원과
남부 깁숙한 한국의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흉노식 동복은 북방계인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청동솟의 용도는 유목민 족장들이 사용하든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훈족은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등자를 사용했다. 등자는 말탄 사람이 마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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