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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미스테리

아틸라 대왕의 최후

453년, 서로마 황제로 부터 받은 황금과 이태리 북부 도시를 페허로 만들며 약탈한 금은 보화를 가지고 헝가리 다뉴브강가 부다로 돌아온 훈족은 자축과 함께 아틸라대왕은 7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아틸라대왕의 새신부는 독일계 일대코(lldeco)공주로 훈족의 족장들과 장군들이 모여 결혼예식이 끝난후 축하 파티에서 술에 만취한 아틸라대왕은 신부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였으나 신방에서 기척이 없자 아틸라대왕의 시종들이 신방으로 들어갔을때 공포에 질린 신부는 침실 한구석에서 울먹이며 있었고 아틸라대왕은 코에서 흘린피가 페로 흘러들어가  이미 자신의 피에 익사한 상태였다.

 

 

중세에 그려진 아틸라대왕의 죽음

 

아틸라대왕의 가족과 측근들은 스키타이 전통 장례식에 따라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내고 흐르는 피로 눈물을 대신하며, 아틸라 대왕이 평소에 사용하든 마구와 무기, 옷을 불태울때 주위에 원형으로 둘러서서 지켜보며 애도를 표했다.

 

그의 시신은 테이스(Theiss)강 물을 막아 물줄기를 돌리고 강바닥을 깊이 판후 시신을 납으로 만든 관에 안치하고 은으로 만든 두번째 관에 넣은후 다시 황금으로 만든 세번째 관에 넣어 매장했다. 마지막으로 관을 묻은 일을 한 병사들은 묘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죽인후 막은 강물을 터 강물에 덮인 대왕의 묘는 영원한 베일속으로 사라졌다.

 

 

테이스 강물을 막아 아틸라대왕을 장사지내는 상상도

 

훈족의 아틸라 대왕은 골에서 서로마와 서고트족의 연합군과 싸워 패한후 이태리를 침공했으나 역시 말라리아와 기근으로 아틸라대왕은 서로마를 그의 무릅 아래 굽히지 못했다.위대한 제국의 건설을 꿈꾸든 아틸라 대왕은 그꿈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었다.

 

 


 

아틸라대왕의 상은 인터넷에 많이 있다. 윗사진은 그많은 아틸라대왕의

초상중 동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틸라 대왕의 궁정에서 대왕을

면담한 프리스커스가 기슬한 모습으로 그는 사각형의 얼굴을 가졌다고 했다.


 

 

 

 

 

아틸라대왕의 암살 음모설

 

아틸라대왕의 죽음에 관해 최근 암살 음모설을 제기한 사람이 있다. 저자는 밥콕(Michael A. Babcock)으로 그의 저서 The Night Atilla died-Solving the Muder of Atilla the Hun 에서 아틸라대왕의 암살설을 제기했다.

 

그는 1,500년전에 죽은 아틸라대왕의 사인을 밝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틸라대왕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의 기록은 죽은후 백년후에 조다니스가 고트족의 역사에 남긴 기록과 고트족의 전설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아틸라대왕의 죽음은 마시안 동로마황제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 되였다고 주장했다.

 

 

밥콕이 제시하는 증거는 아틸라대왕과 동시대를 살았든 프리스커스가 남긴 여행일지 기록을 제시했다. 동로마 외교사절로 아틸라대왕의 궁정을 방문한 프리스커는 아틸라대왕의 만찬에 초대되여 아틸라대왕과 함께식사 하면서 그가 관찰한 아틸라대왕은 조심성 있는 인물로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않는 아틸라대왕이 결혼식후 피로연에서 술에 대취해 새신부와 잠자리에 들어 코에서 흐르는 피가 기도로 넘어가 식도가 파열되 피가 페로 흘러 들어가 지신의 피로 익사 했다는 것은 제삼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점을 들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 그러나 훈족의 아틸라대왕이 로마인들이 알프산 넘어 제민족들을 야만족이라고 멸시한 제민족들과 함께 그가 꿈꾸든 차별없는 대제국을 로마를 멸하고 건설했다면 그결과는 어떻게 되였을까 하고 가정 해본다면, 그결과는 비잔틴제국을 정복한 돌궐족의 운명과 같은 운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상상 할 수 있다. 유럽인과 혼혈로 유럽인에 흡수된 돌궐족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훈족 또한 유럽인과의 혼혈로 몽골유목민족의 모습은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훈족은 서기 370년 유럽침공 직후부터 이민족간의 혼혈이 시작되였고 아틸라대왕 자신도  고트족과의 혼혈로 태어나 잿빗의 눈을 가졌다는 한가지 이유로 훈족의 침입으로 자존심 상한 유럽인들은  아틸라를 백인계 훈족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기때문이다.

 

서로마는 훈족의 이태리 침입에서 자존심을 굽히며 황금으로 평화를 얻었으나 이미 서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지칠대로 지처 제국은 서서히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서로마제국이 역사적인 마지막 공헌이 있다면 그것은  야만족인 훈족과 고트족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활을 하며 고트족의 운명을 결정지어 중세에 현재 서구의 국가를 탄생하게 한 역사적인 역활을 했다는 사실을 들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로마인으로 추앙받는 에이시우수 장군은 골에서 서고트족과 연합으로 훈족을 물리친후 발렌티니안 서로마황제에게 라이벌로 부상하자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발렌티니안 황제는 서기454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에이스우스장군을 암살 했으나 그자신도 다음해인 서기 455년 에이스우스장군 부하의 손에 암살 당한후 서기 476년 서로마는 역사의 장에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