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루니안(Catalaunian Plains)대전
카탈라우니안 평원에서 서기 451년 6월 20일 (Catalaunian Plains) 훈족의 대왕 아틸라와 서로마의 에이시우스장군이 골(Gaul-현재프랑스)을 놓고 한판의 승부를 겨룬 전쟁으로 세계최초 동서양이 대결한 세계10대 대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대전쟁이다.
카탈루니안 대전이 발생한 원인
카탈루니안 평원에서 대전투가 발생한 원인은 서로마 황제 집안 내분으로 부터 시작되였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안(Valentinian III)의 손위 누이인 호노리아(Justa Crata Honoria-콘스탄티우스황제와 갈라 플라씨다[Galla Placida] 사이에서 태어남)공주는 황제와 남매지간으로 발렌티니안 황제는 누이가 동정녀로 살아가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호노리아 공주에게는 원치 않는 강제적인 요구였다,
호노리아 공주가 독신으로 있기를 바라는 발렌티니안 황제의 저의는 자신의 누이가 결혼을 할 경우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가 한 사람 더 생길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호노리아 공주는 Augusta 라는 직함을 가지고 황제를 옆에서 보필하며 동생인 무능한 황제가 의심과 욕심으로 꽉찬 모습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호노리아 공주는 동생인 황제가 제위에 올라 섭정을 한 어머니를 닮아 호노리아 공주는 동생인 황제보다 로마제국을 더잘 통치 할 많한 능력이 있는 여인으로 평가를 받고있는 인물이었다.
호노리아공주는 수도인 라바나(북북 이탈리라)궁성내에 독자적인 자신만의 거주지역에 살고있었다. 서기449년, 호노리아공주는 적절한 시기가 오면 동생인 황제를 제거 하고 로마를 지배하려는 대야망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호노리아공주는 자신의 대야망을 실천 하기위해 자신의 거주지를 관장하는 유지니우스(Eugenius)를 사랑으로 끌여들였다. 유지니우스는 곧 공주의 정략적인 사랑에 빠져 공주와 함께 무능한 발렌티니안 황제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음모는 실행으로 옮기기도 전에 발렌티니안황제에게 알려저 대노한 황제는 유지니우스를 즉시 처형했다. 호노리아공주는 황제의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으로 반역죄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궁성내에 구금당했다.
이사건으로 발렌티니안 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기회있을때 마다 노리는 야심찬 호노리아공주로 부터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호노리아공주의 야심을 잠재울 수 있는 결혼 상대자를 찾다가 명망있고 성격이 원만한 원로원 의원인 허큘라뉴스(Flavius Bassus Herculanus)를 생각해냈다. 황제는 이사람이야 말로 누이인 호노리아 공주가 어떤 야심찬 반역 행위에도 관심을 갖지않을 인물로 그만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후 황제는 공주에게 허큘라뉴스와 결혼 할 것을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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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안 황제와 모친,호노리아공주
구금상태에 있는 호노리아공주는 원치않는 결혼을 강요하는 서로마황제로 부터 자신을 구해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다가 그시대에 로마황제 보다 더강력한 세력을 가진 사람은 훈족의 아틸라대왕 외에는 없다고 판단한후 신임하는 환관 히야신투수(Hyacintus)를 밀사로 보내 황제가 자신이 원치 않는 상대와의 결혼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편지로 전하고 로마황제로 부터 자신을 구출해 주면 아틸라와 결혼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반지를 동봉해서 보냈다.그당시 상대에게 반지를 보내면 청혼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이 있었다.
호노리아공주의 편지를 받은 아틸라는 청혼으로 단정하고 동로마황제 테오도시우수 (Theodosius II)와 서로마 발렌티니안 황제에게 호노리아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하며, 지참금으로 서로마제국 영토의 반인 골(Gaul 현프랑스)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서기 420년부터 훈족에게 매년 조공을 받쳐 평화를 유지하고 있든 겁많은 동로마 황제는 즉시 서로마 발렌티니안 황제에게 호노리아공주를 훈족의 아틸라에게 주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발렌티니안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편지를 아틸라에게 전달한 히야신투를 고문해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죽였다.
서기 450년, 동로마를 지배하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사망했다. 마시안(Marcian-재위기간 450-457)황제가 등극을 했다. 새로 등극한 황제는 겁많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달리 훈족에게 매년 바치든 조공을 거절했다. 아틸라는 제부족장들과 조공을 바치지 않는 동로마와 호노리아 공주와의 결혼과 지참금으로 골지역의 양도를 거부하는 서로마의 대처 방법을 놓고 의논한 끝에 무력으로 골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1962년 National Geographic에 실린 작픔 ("New Views of Medieval Europe" by Kenneth Setton)서기 451년, 훈족의 파티장면
공포에 휩싸인 로마제국
서기 451년, 훈족의 아틸라대왕이 골을 침공하기 위해 판노니아(현 헝가리)를 출발 했다는 급보를 받은 서로마황제는 에이시우스 장군을 골지역으로 보냈다. 그러나 에이시우스 장군이 골로 출발 하면서 로마에서 동원 할 수 있는 군대는 황제와 수도를 수비할 군대외에는 동원할 부대가(Legion)없었다. 골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은 이미 봉급도 제때 주지 못하는지가 오래 되였고 훈족과 싸우기 위해 로마제국 전역에 주둔하고있는 군대를 골로 집결 시키기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로마시민 5명중 3명이 노예, 로마 시민이 아니면 로마군대에 입대 할 수 없었든 로마제국 융성기의 군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발랜티니안 황제가 지배하는 시기의 서로마 군대는 로마인들이 멸시하든 야만족인 고트족과 그외 다른 수의 많은 야만인들이 로마 정규군에 배속되였다 .
로마제국은 지쳐있었다. 야만족인 서고트족(훈족에 밀려나 현프랑스 남서부 중앙지역 Aquitaine에 독자 왕국)반달, 스웨비, 알라마니. 불건디안(Vandals, Suebi, Alamanni, Burgundians)외 많은 야만족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을 입었고 서기 410년, 고트족 알라릭이 로마로 입성해 약탈과 방화로 초토화를 당했다. 시민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국력은 쇄퇘해 있었다. 이런시기에 훈족이 골지역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에 로마제국령내는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훈족이 주는 공포
로마와 주변 제부족이 훈족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은 훈족의 잔인함 때문이었다. 아틸라는 삼촌인 루아로부터 통치권을 물려받은후 대제국을 건설 하려는 야망에 젖어 있었다. 서기 440년, 아틸라는 발칸 동쪽 다뉴브 지역에 있는 나이써스(Naissus)를 공격했다. 이도시는 다뉴브강 남쪽으로 부터 100여 마일 떨어져 있는 니시케바 강(Nischava river)가에 위치해 있었다. 훈족의 공격과 약탈이 있은지 몇년후, 아틸라를 찾아가는 동로마황제의 사절단이 이지역을 통과 할때 시내에서 썩고 있는 시체의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피해 사절단이 강가에서 야영을 할때 강둑에는 인골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로마영토인 다뉴브강 지역에 확고한 거점을 마련한 아틸라는 서기 442년 트리키아(Thrace-발칸반도의 에게해 북동 해안지방)을 공격해 동로마 장군 아스파(Aspar)의 군대를 격파하고 시가지를 초토화 한다음 서기 447년 훈족의 아틸라는 동로마의 영토인 발칸반도를 침입해 닥치는 대로 약탈을 감행했다. 훈족은 도시를 점령한후 약탈이 끈나면 노예로 팔수 없는 어린이나 노약자는 무참하게 학살을 했다. 근대 사가들이 훈족의 아틸라를 어린이 학살자로 모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틸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테로모필레(Thermoplae-기원전 480년 스파르타 장군 레오니다스가 인솔하는 그리스군이 페르시아군과 싸워 전멸한 그리스의 옜 전쟁터)까지 진격하자 테오도시우스 동로마 황제는 아틸라에게 매년 주고있는 황금의 배인 2,100 파운드를 주기로 약속하자 아틸라는 회군했다.
서로마 에이시우스장군과 훈족
동로마가 훈족의 아틸라에게 매년 거금을 지불하며 평화를 유지한 반면 서로마가 훈족에게 평화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든 이유는 에이시우스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스우스장군이 서로마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된 배경에는 훈족의 도움이 있었다. 에이시우스 장군은 서기 425년, 아틸라의 삼촌 루아로부터 훈족의 5만여명 병력을 빌려 로마 황제을 자칭한 요아네스(Joanne) 반란에 가담했으나 반란이 진압되고 요아네스가 처형당한 3일후 수도인 라바나에 5만여명의 훈족의 대군을 대동하고 입성한 에이시우는 훈족의 군대가 있어 발렌티니안황제의 섭정인 황제의 모친 갈라 프라씨다로 부터 사면과 함께 골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였다.
그후 그는 많은 전공을 세운후, 서기 433-450년, 서로마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에이시우스 장군은 젊은 시절 자신이 훈족의 불모로 잡혀있을 당시인 어린시절 부터 친구인 훈족의 아틸라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 훈족에게 쫏겨 서유럽으로 이동한 서고트족왕 테오도릭(Theodoric)과 그외 서로마령내에 거주하는 제부족을 동원하기 위해 먼길을 출발했다.
1962년 National Geographic에 실린 작픔으로 ("New Views of Medieval Europe" by Kenneth Setton)
서기 410년, 고트족의왕 알라릭 (Alaric)이 로마를 점령한 그림. 로마를 점령한 고트족은 훈족 못지않은
약탈과 방화로 로마는 파괴되고 노예로 잡혀온 대부분의 고트족은 알라릭에 의해 자유인이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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