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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미스테리

로마황제를 암살한 훈족 9

로마황제를 암살한 훈족

 

에이시우스와 훈족의 관계는 그의 부친이 아프리카의 백작이라는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로마황족을 대신해서 훈족의 왕인 조카 아틸라의 인질로 교환되면서 시작되였다. 그는 훈족과 지내면서 훈족의 말을 배운 로마인으로, 서로마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릴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훈족을 필요할때 이용할 수 있었기때문이다.

 


고트족 출신으로 알려진 요안네스

 

서기 425년, 이태리 반도에서 요안네스(Joannes)가  자칭 황제에 오르자 에이시우스는 그를 돕기 위해서 훈족의 왕 루아에게 6만의 훈족 군대를 빌려 로마 수도인 라밴나(Ranvenna)로 진격했다. 하지만 요안네스의 반란은 그가 도착하기 3일전에 진압과 동시에 요안네스가 잡혀 이미 처형을 당한 후였다. 에이시우스는 훈족 6만의 군대로 로마를 위협해 433년 로마와 조약을 맺어 판노니아(Pannonia seccunda-로마 제국의 속주(현재의 헝가리 서부와 오스트리아 동부 일부 및 유고슬라비아 북부 일부에 해당하는 광할한 지역)를 훈족에게 할양받게 해주었다.

 

유목민족인 훈족이 이 지역의 땅을 활량 받으면서 훈족은 정착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황제는 6만의 훈족군대를 거느린 에이시우스의 반역행위를 사면 하지 않을수 없어 그를 사면했다. 사면과 동시에 에이시우스는 거울(Gaul현재의 프랑스, 발렌티니안 황제의 사유지) 총독인 발린티니안3세 모후인 플라시다로 부터 거울지역군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였다.

 

에이시우스는 거울 지역에서 서고트족을 남쪽 프랑스지역으로 몰아내며, 라인지역의 수비를 보강하며 노리콤(Noricum-도나우강 남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오스트리아 중부와 바이에른 지역)을 고트족의 침공으로 부터 수비했다.

 

이때 아프리카 백작인 보나피스는 에이시우스와 로마장군들의 이간질로인해 총독인 발렌티니안 어머니 플라시다아로 부터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보나피스는 아프리카에서 반달족을 끌어둘여 반란을 일으킨 후에 로마로 귀환명령을 받고 432년 로마로 돌아가 총독의 지위에 임명되였다.

 


  발렌티니안 황제의 모친

 

보나피스의 로마 귀한은 황제의 어머니인 플라시디아가 보나피스를 제거하기 위한 계락으로 믿고 에이시우스는 보나피스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보나피스가 승리했으나 전투 중 입은 중상으로 보나피스는 몇 개월 후에 죽었으며, 에이시우스는 달마티아(Dalmatia-유고슬라비아 서부의 아드리아 해 연안 지방)로 피신을 했고, 에이시우스의 도움으로 판노니아지역을 얻은 훈족군대의 도움으로 황제의 어머니인 플라시다아는 서기 433년 에이시우스를 총독의 지위에 임명했다.이때부터 에이시우스의 훈족 군대는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였다.

 

서기 433~450년, 에이시우는 서로마의 대표적인 인물로 떠오르며, 로마에서 황제 다음가는 실권을 가진 귀족으로 부상하였다. 후에 에이시우스가 유럽을 야만족인 훈족으로 부터 구출했다는 찬사를 받게된 배경은 훈족의 군대가 있었기때문에 가능했으며, 그는 훈족과 서로마를 이용해서 출세의 길에오른 에이시우스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대표적인 로마장군이 되었다.

 

총독의 지위에 다시오른 그는 거울(Gaul-프랑스지역)지역 내치에 주력하고 있던 서기 436년, 불간디(Burgandian)인들의 소요사태를 막기위해 다시 훈족의 군대를 끌여들여 2만명의 불간디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훈족과 에이시우스가 단행한 대학살은 독일의 대서사시 니블롱겐(Niebelungenlied)의 소재가 되었다.

 


에이시우스를 암살한 발렌티니안 황제(Valentinian III)

 

서기451년 살롱대전에서 훈족의왕 아틸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로 돌아온 에이시우스는 453년,아들 가우덴티우스(Gaudentius)가 발렌티니안 황제의 딸인 플라시디아(Placidia)와 약혼하게 되자 로마황제는 에이시우스가 전에 황제에 올랐던 요안나스를 지지했고, 이제는 에이시스우가 그의 아들을 이용해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시작했다.

 

황제의 마음을 알아챈 시종관 헤라클리우스(Heraclius)와 원로 원의원 맥시무스(Maximus)는 발렌티니우스3세 황제와 함께 에이시우스를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서기 454년 9월 21일, 에이시우스가 재정보고를 하기위해 궁정에 도착하자 발렌티니안 황제는 에이시우스를 자신의 손으로 살해했다.


             맥시무스

 

에이시우스의 살해 현장에 있던 로마장군 훌로렌티우스(Florentius)는 "황제는 왼손으로 에이시우스의 오른손을 잘랐다"고 살해 장면을 전했다. 에이시우스 살해음모에 가담한 맥시무스는 에이시우스가 살해되면 그의 지위를 받기로 황제와 약속이 되어있었으나 그 약속은 황제의 시종관인 헤라클리우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이시우스 암살 후, 뜻을 이루지 못한 맥시무스는 발랜티니안 3세와 헤라클리우스를 죽여 복수하기로 결정하고 에이시우스의 친구인 훈족 아틸라(Optila)와 트라우스틸라(Thraustila)를 끌어들였다. 이 두사람은 에이시우스의 친구라기 보다는 에이시우스가 훈족을 지휘할때 그의 참모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서기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안 황제는 그의 군대가 시행하는 활사격 연습 현장에 참석차 신전건물 앞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리는 순간, 아틸라는 발렌티니안 황제를 칼로 찔렀다. 놀란 황제가 누구인가 획인하기 위해 뒤돌아보는 순간 아틸라는 다시 황제를 찔러 죽였다. 이때 트라우스틸라가 앞으로 나와 겁에질려 떨고 서있는 황제의 시종관인 헤라클리우스를 칼로 찔려 죽였다.

 

황제의 군대가 도열한 앞에서 황제와 그의 시종관이 두 명의 훈족에게 살해되는 현장을 지켜 보면서도 황제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군인은 한명도 없었다. 황제의 군대는 에이스우스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로마황제의 암살은 몇개의 설이 있으며 그중의 하나가 훈족의 개입이고 다른 한개의 설은 에이시우스의 고트족 부관이이라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