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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미스테리

훈족과 서로마군의 피로 물든 카탈루니안 대평원 12

서기 451년 4월20일경, 30만으로 추정되는 훈족의 대군은 라인강을 건너 고대 대도시인 레임, 마인즈, 스트라스버그, 콜론, 웜스, 트라이(Rhems,Mainz, Strasbour, cologne Worms and Trier) 들을 차레로 공격해 약탈한후 불을질러 초토화 시키며, 파리로 진군할때 유럽은 공포에 휩싸였다. 훈족의 대군이 파리를 향해 진군한다는 소문에 파리 시민들은 훈족을 피해 파리를 빠져 나가기 시작헀다. 이때 파리에 거주하는 동정녀인 제네비비(St Genevieve-후에 성인으로 추대)는 공포에 떠는 시민들에게 회계의 기도를 다함께 하자고 외치며 파리시민들을 설득하자 시민들은 그녀의 말에 따라 기도를 하기시작했다. 그녀와 파리 시민들의 기도의 결과는 기적처럼 나타나 아틸라는 파리를 비켜지나갔다.

 

훈족의 대군은 알란족의 왕 상지방(Sangiban)이 지배하고 있는 골(Gaul)에있는 아우렐리아니(Aureliani)에 도착했다. 상지방은 이지역을 아틸라대왕에게 양도하기로 약속이 되여 있었다. 상지방이 아틸라의 충복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서로마의 에이시우스장군과 서고트족왕 테오도리드(Theodorid)는 한발 먼저 발빠르게 도착해 상지방의 근거지를 점령하고 상지방을 협박해 로마군에 협조 할 것을 강요한후 서로마군연합군은 주변에 토성을 쌓고 훈족의 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틸라대왕은 협소한 지역에서 대군을 이끌고 승산없는 전투를 피하기 위해 적과의 대치를 풀고 철수를 명령했다. 훈족의 대군이 아울레리아니를 썰물 처럼 빠져나가자 로마연합군은 퇴각하는 훈족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사기는 충천했다.

 

서기 451년 6월 19일, 해가지고 떵거미가 내리는  저녁, 훈족의 30만 대군은 카탈루니안 대평원에 도착했다.알란족의 왕 상지방은 에이시우수 장군이 이끄는 대군에게 대적할 기회도 없이 로마군에 투항을 했으나 훈족의 아틸라대왕은 자신이 신뢰하고 있든  부하가 배신을 했다고 생각하자  곧 시작될 전쟁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틸라 대왕은 잠시 깁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  전쟁에서 대패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히자 그는 점술가를 불렀다.

 

점술가는 모닥불을 피워 짐승의 뼈를 태웠다. 불에탄 뼈가 갈라지고 검고 누렇게 변한 뼈의 형태를 보고 점술가는 점쾌를 읽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에서 대왕의 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한명의 장군(일설에는 한왕)을 잃게 것입니다. 적장이 죽음으로 이번 전쟁에서 대왕은 완벽한 승리를 거둘것입니다. 아틸라대왕은 이번전쟁에서 적장이 죽는다면 그것은 에이시우스 장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틸라대왕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기전 점으로 전쟁의 결과를 예견 했지만 이번 전쟁에서 얻은 점쾌는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서기 451년 6월 20일, 동방에서 바람과 같이 나타나 전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황색 인종인 훈족과 그들에게 충성을 다바치는 로마제국의 변방에 살든 야만 제부족의 연합 대군과, 서로마제국을 이들로 부터 지키려는 서로마제국과 야만족 연합군의 역사적인 대전쟁이 시작되는 아침이 밝아왔다. 유럽의 백인우월 주의자들이 유럽인을 황인종으로 부터 지킨 세계 최초의 인종간의 대전쟁이라고 평가하는 카탈루니안 대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훈족연합군의 편성

 

훈족 아틸라대왕의 연합군의 편성은 독일계의 용맹스럽고 아틸라 대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동고트Ostrogoth)과 왕 발라미르와 그형제들(Valalmir, Thiudimer , Vidimer),  영특하고 지혜롭다고 명성이 자자한 게피드(Gepide)족의 왕 아다릭(Ardirc), 벌군디안 (Bergundian), 알란족(Alan-페르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민족으로 사마시안(Samartian)과 같이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부족), 후랭크족(Frank)과 몇개의 부족은 서로마군과 아틸라를 지지하는 두파로 갈라지고 그외 다수의 부족으로 구성 되였다. 아틸라대왕은 동고트족과 제부족이 서로마의연합부족과의 대전에서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것이라고 생각하자 이대전에서 이길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훈족연합군의 총병력 30만중 황색인종인 순수한 훈족의 병력은 약25%. (참고1)

 

로마연합군의 편성

 

서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에이시우스 장군의 지략으로 로마군과 동등한 자격으로 집결한 야만족의 부족은 서고트족, 후랭크족, 사마시안, 아모르키안, 리티시안, 벌간디안,쌕슨, 리파리안,올리브리온,캘틱족( Visigoth, Franks, Sarmtians, Armoricians, Liticians, Burgundians, Saxons, Riparians, Olibriones, Celtic)외 독일어를 사용하는 제부족이다. 로마가 공동의 적이이었든 제부족을 로마의 에이시우스 장군이 연합군으로 끌어들있 수 있었든 이유는 그가가진 탁월한 권모술수와 외교솜씨의 결과이며, 또 훈족은 로마와 제부족의 공동이 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반달족과 서로마황제 발랜타인황제에게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든 서고토족의 왕 테오도리드가 두아들과 부족을 이끌고 로마연합군에 가담하게된 동기는 서로마황제 발렌티니안의 과거를 잊고 로마제국과 서고트족 공동의 적인 훈족을 함께 싸워 이기자는 간곡한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테오도리드는 딸을 반달족(Vandal 족은 독일어를 쓰는 종족으로 그 잔인함이 훈족에 못지 않아 Vandalism의 어원이 되기도 한 종족이며, 로마를 4번째로 점령한 종족)의왕 가이세릭(Gaiseric)의 아들 후네릭(Huneric)과 결혼을 시켰다. 이유는 부족간의 갈등을 막기위한 정략적인 혼사였다. 이미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는 후네릭이 발랜티니안 황제의딸 유도시아(Eudocia)와 결혼을 주선한 에이시우스 장군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날로 강성해지는 반달족을 무력으로 제압 할 수 없다고 판단 해서 반달족과 로마황실을 정략적인 결혼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떄문이다. 발렌티니안 황제의 또다른 속셈은 자신의 딸이 강력한 반달족과의 혼인으로 에이스우수 장군과 훈족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 딸의 결혼을 승락했다.

 

그러나 잔인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릭은 테오도리드의 딸이 필요없게 되자 그의 아들 후네릭을 독살 하려 했다는 누명을 쒸워 며느리인 테오도리드 딸의 코를 잘라내고 귀를 자른 다음 서고트족왕인 테오도리드에게 돌려보냈다. 그런 사건이 있은후 반달족과 서고트족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가이세릭이 훈족의왕 아틸라 대왕에게 서고트족을 처 없애달라는 부탁과 함께 많은 선물을 보낸것도 서고트족왕을 격분케 했다]

 

서로마 연합군 총병력은 훈족과 비교해 기병에 약한 단점을 보충하기 위해 훈족의 병력보다 더많은 병력이 필요했을것이라고 생각되나 훈족과 거의 같은 수의 30여만의 병력으로 보고 있다.

 

전쟁의 시작

 

아침일찍 일어나 지형을 관찰하든 아틸라대왕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평지인 카탈루니안 대평원에 가파른 산이 우뚝 솟아있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늦게 도착한 아틸라대왕은 평지에 산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 자신의 실수를 후회했으나 그것은 이미 돌이킬수 없는 실수였다. 고대전이나 현대전이나 전투지역에서 고지의 점령은 기본 상식이다. 훈족은 이산의 바른쪽편에 군대를 주둔하고 서로마 연합군은 이산의 왼쪽편에 주둔하고 대치상태로 들어갔다.

 

훈족의 아틸라 대왕은 서부영화에서나 볼수있는 마차를 이용해 진중앙에 자신을 적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 할 수있는 원형의 방어벽을 구축하고 정예 훈족을 배치해 놓고 자신은 중앙에서 지휘를 하며, 왼쪽과 바른쪽진은 연합군인 동고트족과 제부족으로 대군을 배치하고 동고트족의왕 발라미르와 그의 형제 티우디머, 비드머 형제 (Valamir, Thiudimer, Vidimer)가 지휘를 했다.

 

서로마 연합군의 에이시우스 장군은 진중앙에 아틸라대왕의  심복인  상지방과 그의 군대를 배치하고, 서고트족의 왕 데오도리드와 그의 군사와 제부족의 군사로 우익을, 에이시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대는 좌익에 제부족의 군사와 함께 배치하고 상지방과 그의 군사를 감시 하기로 했다.

 

전쟁의 시작은 평원에 우뚝 서있는 고지를 놓고 전투가 시작되였다. 훈족의 아틸라대왕은 즉시 산의 정상을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급파했다. 그러나 고지는 이미 서고토족 왕의 아들인 토리스머드(Thorismud)와 에이시우수 장군의 부관인 티우투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훈족은 몇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산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서고트족에게 번번이 패하고 밀려났다. 시각은 오후두시, 아틸라대왕은 승산없는 산의 공격을 중지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긴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연설의 마직박 부분에서, 오늘 이전쟁에서 죽을자는 이전쟁터에 와있지 않아도 죽을 것이다. 그는 이어서 내가 적진에 제일 먼저 창을 던질것이다, 내가 적과 싸울때 뒤에 처지는 자는 내검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카탈루니안 대전 상상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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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니안 대전 상상도 2

 

아틸라대왕의 긴연설이 끝나자 사기가 충천한 훈족의 연합군은 지축을 흔드는 함성과 함께 훈족특유의 괴성을 지르면서 서로마연합군의 중군인 알란족 왕 상지방의 진을 향해 제일진이 공격을했다. 훈족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서로마군의 좌군과 우군이 밀려오는 훈족을 차단하자 훈족의 제2진이 공격을 하면서 적과 아군이 겹겹이 쌓여 가며 해가지자 전장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투가 계속 되는중 서고트족의 왕 태오도리드가 자신의 군사를 독려하기 위해 나섰다가 동고트족 안다그(Andag)의 창에 찔려죽었다.

 

죽은 병사가 시체가 대평원에 쌓여가며, 시체에서 흐르는 피는 평원의 저지대에 흐르는 냇물로 흘러 들어가 비한방울 오지 않았으나 냇물은 수위가 높아가며 소용돌이 치며 흐르고 목타는 양군의 부상병은 죽은 동료의 피를 마실때 대평원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훈족의왕 아틸라 대왕의 정예군을 향해 알란족에서 이탈한 서고트족이 공격을 하자, 아틸라대왕은 이들과 싸우면서 퇴각해 우마차로 구축한 방어벽 안으로 피신을 했다. 이때 산위에서 공격하는 훈족과 싸웠든 서고트족 왕의 아들 토리스머드가 산에서 내려와 자신의 군대로 착각하고 훈족의 아틸라대왕이 구축한 방어벽으로 접근 하다가 훈족으로 부터 머리를 맞고 말에서 떨어져 훈족에게 끌려 가다가 서고트족 병사들의 도움으로 살아나 적진을 벗어날수 있었다. 에이시우스 장군도 캄캄한 밤이어서 적진으로 들어가 방황하다 운좋게도 서고트족을 만나 그의 진으로 돌아가 군사들에 둘러쌓여 진을 지키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훈족의 연합군과 서로마의 연합군과 전쟁에서 양군합처 16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끝나고 아침이 밝았다.  대평원은 시신으로 쌓이고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에이시우스장군은 날이 밝자 훈족의 아틸라대왕의 진은 그대로 있다는 사시을 발견했다. 서고특족 왕의 아들 토리스머드는 부친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훈족을 공격하자고 했으나 에이시우스 장군은 공격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에게 부친의 시신을 찾아 그의 아바지가 다스리던 땅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아들이 여섯명인 서고트족왕이 죽음으로 왕권을 놓고 형제 간에 피흘리는 일이 없도록 장자인 토리스머드를 종용했다. 그는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갔다.

 

에이시우스 장군이 훈족을 공격을 하지 않은 첫번째 이유는 서로마의 연합군도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훈족을 공격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수 없다는 사실과, 두번째 운좋게 훈족을 완전 섬멸 한 후에 벌어질 사태, 즉 훈족이 세력을 잃었을때 동서고트족이 큰세력으로 부상해 로마제국을 위협 할 수 있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어 훈족의 존재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참고2)

 

훈족의 아틸라대왕도 아침이되자 서로마군의 연합군쪽을 바라보면서 있을지도 모를 공격에 대비했으나 시간이 흘러도 적진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조용했다. 척후병이 서고트족의 퇴각을 알려오자 그는 지난밤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했다고 믿기 시작하며, 서고트족의 왕 테로도리드 전사했다는 소식은 어젯밤의 점쾌가 맞았다고 생각하자 전쟁의 피로가 가시며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틸라대왕은 전군에 퇴각령을 내렸다.

 

이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독일민족(German-Peoples defender)이었다고 할 수 도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제부족이 참가해 참전한 훈족과 서로마의 전쟁은 게르만 동족간의 전쟁이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1-훈족연합군과 서로마 연합군의 병력수는 자료마다 달라 훈족의 병력을 15-60만 까지 기록하고 있다. 기병이 우세한 훈족을 맞은 서로마군은 훈족의 군대와 비슷하거나 많았다고 볼수있다.

 

참고2-고트족 출신 조다니스의 저서 고트족의 역사에서 훈족은 이전쟁에서 대패해 병력을 거의 다 잃은 것으로 묘사 했으나, 훈족이나 서로마군이나 이전쟁에서 막대한 병력을 읽은것은 쌍방이 비슷하다. 훈족이 병력을 이전쟁에서 다잃었다면 아틸라 대왕은 다음해에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보는 로마군의 전술

 

로마제국이 야만족의 대표적인 기마민족인 훈족과 대전에서 로마군은 어떤 전술로 대항을

했는지를 고찰 해보면 로마군의 대표적인 5개의 전술에서 아래 그림에서 보는 두개의 방어진법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 할 수있다. 사가들은 로마제국에서 등자가 사용된시기를 6세기로 보고 있으나 고대  군사전문가들은 5세기초에 이미 로마군은 훈족이 사용하는 등자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고있다.

 

로마의 적인 야만족과 서로마군으로 으로 구성된 서로마 연합군이 카탈라우니안 대평원에서 훈족과의 전쟁에서 사용했으리라고 추정되는 로마군의 두가지 방어진법은 아래와 같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Reple Cavalry (적기병 방어진)- 공격해오는 적의 기병을 막기위한 진법. 첫째줄 보병이 앉은자세로 방패로 첫번째 방어벽을 구축한다음 장창을 세운후 두번째줄 보병이 서있는 자세로 방패를들고 제이의 방어벽을 구축하고 장창을 던질 자세로 서 있다. 달려오는 적기병이 방어진을 격파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순간 장창으로 적기병을 공격 한 후,  뒤에 서 있는 궁기병이 화살로 적의 기병을 공격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ortoise-(거북방어진) 방패를 사용한 거북형상의 방어진은 적군의 궁기병의 화살공격, 투창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로마군의 방어진이다. 그러나 훈족의 전술은 로마군과의 초전에서  근접전을 사용하는 대신 원거리에서 로마군의 칙면과 뒷면을 화살로 공격해서 방어벽을 파괴한 다음 흩어진 로마군에 접근해 근접전에서 검으로 적병을 섬멸한후 퇴각하는 로마군에게 그물을 던저 로마군을 사로 잡았다.훈족과의

전투에서는 별로 효과가 없는 전술이었다.

 


참고

위 로마군의 거북방어 전술은 로마군의 기본방어 전술로 영화가 아닌 역사적인고증으로 현대에 재현한 로마전성기의 무장전술의 재현모습들이다. 로마제국 군대의 장비가 시대에 따라 변해도 방어전술은 유지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