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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미스테리

서기 452년 아태리를 침공한 훈족 13

카탈루니안 대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골(Gaul)을 얻지 못한 훈족은 다시 라인강을 건너 헝가리 부다로 퇴각했다.그러나 다음해인 서기 452년, 복수심에 불타는 아틸라대왕의 대군은 줄리안 알프스(Julian Alps 1)를 추위와 싸우며 한 겨울에 넘었다. 알프스 산을 겨울에 넘으며 고생한 훈족이지만 이만한 일로 사기가 죽을 훈족이 아니다.

 

훈족의 산업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산업이 있다면 그들의 유일한 산업이야 말로 전쟁이며,말과 복강궁으로 무장한 훈족의 괴력은 로마군을 압도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해 동로마를 압박해 조공을 받아내고 독일계 제종족을 대대로 살던 땅에서 몰아내 서쪽으로 떠나가게 한후 그지역을 차지한 훈족을 가로 막을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탈루니안 대전에서 패한 아틸라대왕은  호노리아 공주와의 결혼을  재차 요구하면서 명분 삼아 대군을 이끌고 부상당한 성난 호랑이 같이 북부 이태리를 노도와 같이 침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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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리를 침공한 훈족

 

훈족은 이태리 북부 아드리아 해안. 발렌티니안 황제의 궁궐이 있는 근처의 항구도시인 아쿠엘리아(Aquileia)를 공격했다. 삼개월동안 성을 포위한 훈족의 대군은 성벽을 파괴 할 수있는 공성무기를 총동원해서 공격하자 마침내 성벽이 무너지고 훈족의 대군이 시내로 들어갈때, 아틸라대왕은 건물에 집을 짓고 사는 황새(2)가 이도시의 운명을 예고하듯 새끼를 입에 물고 시외곽으로 날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아틸라대왕은 말했다, 황새가 둥지를 떠나는 것은 신의 뜻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의 대군은 전시가를 누비며 약탈하자 아름다운 항구와 시가지는 완전하게 파괴되 페허로 변하며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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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52년 훈족의 침공으로 페허가된 아퀴엘리아는  그당시의 참상을 말해주며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아쿠엘리아와 함께  밀란(Milan), 베로나(Verona), 파두아(Padua)도 잿더미리로 변하며 공포에 떠는 시민들은 훈족이 추격할 수 없는 늪지대로 피신했다. 북부 이태리에서 사태가 심각하게 변하자 로마 황제와 시민들은 에이시우스장군이 카탈루니안 대전에서 훈족을 환전 섬멸하지 않아서 훈족의 침입을 초래했다고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에이시우스장군은 영원한 친구이자 적으로 변한 훈족의 아틸라대왕의 이태리침공에 대전하기 위해 서고트족과 알란족의 협조를 얻으려 했으나 카탈루니안 대전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그들을 설득 할 수 가 없었다. 또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만으로 훈족을 대항 하다가 병력의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에이시우스 장군의 입지를 지탱하기 힘든 사태로 몰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에이시우스장군은 방관외에는 그가 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군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장큰 우려중의 하나는 이전쟁에 참가해서 병력을 잃을 경우 서로마제국은 새로운 병력의 보충을 위해 지출 할 재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랜티나안 황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해 교황 레오(Leo)를 특사로 삼아 아틸라와 협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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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소장의 후리스코, 아틸라대왕과 교황 레오의 담판. 문예부흥기 라파엘의 작픔

 

훈족의 아틸라 대왕은 로마 황제 발렌티니안을 압박 하면서 교황레오 1세와 담판에 응했다. 로마 캐톨릭교회는  이담판을 교회 역사상 유명한 기적중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교회 기록은, 교황레오와 아틸라가 조우할때 하늘에는 성 베드로와 바울이 나타나 이교도인 아틸라대왕이 혼이 빠지며, 우아한 복장을 한 교황의 달변이 아틸라를 설득해 아틸라대왕이 이태리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이공로로 교황레오1세는 대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역사는 교황과 아틸라의 만남을 교회기록과는 정반대로 기록했다. 교황레오와 아틸라대왕은 그시대를 대표하는 달변가였다. 달변가인 두사람의 협상은 아틸라대왕의 요구로 말을 타고 말잔등에서 장장 열시간의 협상을 벌였다. 말에 익숙하지 않은 교황레오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아틸라대왕의 계락에 빠진 교황은 말잔등에서 장시간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결국 로마황제가 많은 황금을 아틸라대왕에게 주기로 약속해 협상은 아틸라대왕의 뜻대로 타결 되였다.

 

서기 451-452 년의 계속된 가믐으로 훈족의 아틸라대왕도 훈족이 아닌 알란족과 동고트족의 군대를 먹일 식량이 부족해 곤경에 빠지면서 설상가성으로 말라리아가 훈족의 군대에 유행하면서 사기가 떨어져 아틸라대왕은 약탈품과 로마황제로 부터 받은 황금을 챙긴후 이태리에서 철군해 그의 근거지인 헝가리 다뉴브강가 부다로 돌아갔다.

 

훈족의 이태리 침입으로 파괴된 도시를 탈출한 난민들은 훈족이 추격 할 수없는 베니스라는 새로운 도시를 늡지에 세웠다. 파괴된 도시에서 도망가는 난민을 추격하든 훈족의 병사가 늪지에서 말발굽이 빠져 그이상 난민을 추격하지 못하자 베니 앗시움(Venne Atsium-나는 여기까지 왔다)라고 한 말이 새로운 도시인 베니스의 이름을 탄생시켰다.

 

참고1 Julian Alps

동부이태리와 슬로베니아 사이의 알프스 연봉중의 하나로 줄리우스 씨저의 이름을 따라 지은 석회암 연봉으로 해발 2864m.

 

참고2

한국에서 어린이가 애기는 어떻게 생기느냐고 묻는 질문에 어른들은 삼신 할머니가 준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어린이의 이런질문에 사람사는 건물에 집을 짓고 사는 황새가  어린애를 배달해 준다고 한다. 이전설은 현재도 자녀출생 카드에 황새가 어린이를 입에물고 날아 배달 하는 그림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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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배달하는 황새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