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사는 이야기

빛바랜 사진 들추며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신불산은 부산을 지척에 두고 있는 산으로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지만 이곳이 과거 지리산 처럼 무장공비들의 아지트로 인근 지역에서 이들이 양민 200∼300여 명을 살해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200-400명의 공비가 신불산과 인근 영취산을 근거지로 삼아 철도와 도로를 차단하고 미군수송 차량과 기차에서 800여정의 무기와 몇만발의 실탄과 식품을 약탈했다.



신불산은 남쪽으로 부산의 금정산, 서쪽으로 지리산, 서북쪽으로 팔공산까지 연결되는 지역으로 공비가 활동하기에 지리산 만큼이나  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공비들은 참호를 파고 토벌군에게 저항하면서 인근 지역마을을 습격해 무고한 양민들을사살했다.


1954년 군경합동작전으로 벌인 신불산 공비 토벌작전에 미공군의 항공지원을 받아 도주하는 공비를 완전 소탕했다.


그로부터 11년후, 1965년 한국군에서 15개월의 군생활을 한후 20대 초반의 이노병이 카투사로 특명을 받아 베치된곳이 바로 악명높은 공비가 준동했든 신불산 정상에 위치한  미8군 장거리 통신대 Microwave and VHF Relay station, Brooklyn Site였다. 해발 1,200여미터인 신불산 정상에는 거의 매일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통신중계소에는 5명의 미군과 2명의 카투사가 배치되여 있었다.


중계소를 위해 3대의 대형발전기와 식수를 위해 계곡의 물을 펌푸를 이용해 24시간  공급하는 시설과 7명을 위한 생활관과
이들을 위한 식당에는 하루세번의 따듯한 식사를 제공하는 시설은 완벽한 소도시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1명의 정식 쿡과 두병의 쿡 보조원이 식사를 책임지고 3명의 통신기사와 4명의 경비원이 상주했다. 입대하기전 월급 2만원을 받았는데 중계소에 근무하는 한국인 경비원의 한달급료가 20만원, 한국인 통신기사의 급료가 한달 30만원 이었다.63년 영등포에 28만원을 주고 큰삼촌이 가난한 동생인 내부친을 위해 집을 한채 사주었는데...그당시 한국인 경비원과 통신기사들의 월급이 어느정도로 많은지 비교가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급료였다.



월남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든 그때 그시절, 추수감사절에 먹을 터키를 부산에 있는 식품창고에서 수령해 왔는데 1945년에 냉동된 칠면조 였다. 이신불산 통신 증계소에 도착한후 시설을 사용하면서 느낀점은 바로 상상을 불허하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국력이었다.


한국군 대전통신학교에서 4개월간 모르스 부호(간첩들이 많이 사용하는 통신, 최근에 북한에서 남한에 있는 간첩들에게 보내는 통신문을 보내는 방법)통신병이었는데 이중계소에서는 쓸모가 없고 또 통신중계는 알지도 못해서 운영은 주로 한국인 기사들이 담당하고 미군과 카투사들은 할일이 없으니 주로 먹고 당구치고 꿩사녕하며 노는게 일과 였다.


공짜영어 선생 5명이 옆에서 함께 살고 있었으니... 그때 영어를 배웠다. 중계소 밖에 나가면 산정상은 평지였다 공비들이파놓은 참호가 그때까지도 수없이 많이 있었다. 인골이 있는 참호도 있었다.


북한에서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부친이 한국공군과 계약으로 사용한 후생사업용 트럭. 그당시 북한
군으로 부터 노획한 소련제 질 트럭과 같은 북한군 트럭

 
부친이 후생사업하는 트럭으로 지리산 근처를 갔다가 부친과 기사는 빨치산들의 공격으로 트럭과 함께 화물을 빼앗기고
구사일생으로 몸만 빈손으로 살아 돌아오신후 
파산을 한 집안에서 죽을 고생만하다가 신불산 통신중계소에서 생활한
10여개월간의 군생활은 그때 그시절 생전 처음
누려보는 호강이었다. 


잊지못할 그때 그시절 남은 것은 빛바랜 사진 한장.  왼쪽에서 2번째가 노병의 20대 초반 한국군 시절 모습


신불산 정상에 위치했든 통신중계소에 함께 근무했든 동료들과 함께한 사진. 바른쪽에 건물이 생활관, 바른쪽 앞쪽에 통신중계 기계실과 대형 안테나탑이 서있었고 그옆에 발전실이있다. 사진에보이지 않는 왼쪽에 식당과 경비원들의 식당건물이 있었다.왼쪽에서 두번째가 노병의 20대 초반 모습. 이노병이 그때 양산읍에 놀려 내려가면 젊은 날의 이노병을 보려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 보다 잘생긴 군인이 미군통신대에 근무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불산 정상 아레에 운해가 끼어 구름이 계곡아래로 흐를때는 거대한 구름 폭포가 되여 장관을 이루는 광경을 잊을수 없는 이통신 중계소를 떠나 제대를 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나 70년 미군복으로 갈아입고 71년 월남 참전후, 72년  한국으로 특명을받고 고향으로 돌아 갔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그곳으로, 통신대에 근무할때 친하게 지냈든 한국인들을 만났었다. 82년 대구에서 근무할때도 방문했었는데, 어제 밤 아무리 검색을 해도 통신중계소를 신불산 사진에서 찾을수 없었다. 완전 폐쇠 된것 같다. 첫사랑의 여인 다음으로 보고 싶고 그리운 그곳, 이제 영영 가볼수 없는 곳이 되였다.








 

'세상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절한 유혹  (0) 2019.08.08
21세기에 양공주 찾는 개 돼지들  (0) 2019.08.06
맘대로 안되는 변기  (0) 2019.06.25
믿을수 없는 신문기사  (0) 2019.06.22
아침부터 총찾아 3만리  (0) 2019.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