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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있었든 인종 차별

몇년전,  거의 매년가는 한국 휴가길에서  들은 이야기를 패드에

써놓고 잊고 있다가 몇년이 지나서  아래글을 찾아냈다. 

 

 한국에서 휴가중 혼자 밥먹기가 격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고역이고

죽을 맛이다. 그래서 매년 한국으로 유가를 갈때마다  젊은 병사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볼수있는 

 Dragon Hill 호텔 레스토랑이나, 아니면 용산미군영내 후드 컷에서 식사를 해결 하면서 식사후에는

항상 잊지 않고 후드컽 내에 있는 스타 벅스에서 라떼 한잔 사들고 밖으로  나가

 건물 밖에 놓여있는  빈의자에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새로  앉아서 한대 피우며 현역시절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추억속의 셰계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그날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아침겸 점심인 브런치를 먹고, 라떼 한잔 사들고 후드 컷 밖으로 나가

의자에 앉아서 젊은 후배 미군 병사들을 지켜보면서 그옛날 현역시절의 추억에 빠져들어가

헤메일때, 낮선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낮선 사람과 이얘기 저얘기 나누다가, 그낮선 사람은  자신은 미군으로 은퇴한 형님이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자신의 가족은 6.25사변때 평안도에서 피난을 내려와 서울서 살다가

1952년 자신보다 3살 많은 12살인 형님이 가족과 헤어져 고아가 되여 미군에게

입양되여 미국으로가 생이별을 했다가 1962년 형님이 미군에 입대해 한국에 배치되여

한국으로 와서 신문에 가족을 찾는 사연이 소개되여 다시 가족과 재회를 했다고 했다.

 

잠시후, 낮선이의 형님이 왔다. 인사를 나누자 자신은 30년 미군에 복무하고

은퇴를 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서 1952년 양부를 따라 미국에 도착했을떄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해 양부모와 함께 버스를 타면 앞에 탈수가 있었으나 혼자 버스를

탈떄는 흑인과 함께 버스 뒷좌석에 앉아야 했다고 했다.

 

그는 현역으로 미군에 입대해서 병장으로 진급했어도 일과 끝나고 계속 사역을 시켜 왜

그러느냐고 선임부사관애게 묻자,"너는 외국인이기 떄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한달의

휴가를 내어 미시민권 시험준비를 하고 시험에 합격해 미국시민권을 받았다.

 

1950년, 6.25전쟁으로 평생 들어 보지도 못한 미군은 태평양 건너 멀고 먼 한국에 와서

황인종을 위해 싸우다 4만5천명의 미군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러니 미국

본토에서는 구태의연하게도 유색인종에게 전근대적인 차별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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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의 백인 전용 수돗물은 냉동기를 사용해 시원한 물을 제공하나, 바른쪽의 유색인종이

마시는 수돗물은 그저 가공되지 않은 후덥지근한 수돗물이다.10여년전, 달라스 시청

에서 시청사를 수리하면서 그옛날 백인과 유색인종이 마시는 물을 윗사진과 같이

분리한 수돗물 안내판이 페인트로 칠해져 사라졌든 사실을 발견하고 역사의 일부로

간직하자고 했으나 그결과가 어떻게 되였는지 모르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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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색인종은 버스뒷좌석에 앉으라는 안내판이 주물로 제작되여 버스에 부착되였든 이 안내 판은

현재 이베이에 매물로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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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라고 인종차별에서 예외일수는 없었다. 20불에 매룰로 나와있는 이 안내판의

내용은 윈쪽은 백인 사병용 샤워, 바른쪽은 유색인종 사병용 샤워라는 안내판이다.

맨아래줄 작을 글씨는 이 안내판은 미군양식번호 11734. 발행자는 미육군부다.

 

미국군대에서 있었든 인종차별의 예를 들어보면, 1차대전(1914-1918)때 흑인은 징집되여

유럽전선에 투입되여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새우고 미국으로돌아와 시가행진도  했다,

 1차대전때 독일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새웠든 흑인들은 이차대전때는 전투부대 배속을 금했다.

 

 "흑인은 전투를 할줄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지나가는 개가 웃을일이 벌어진것이다.

다수의 백인종이 소수의 타인종을 차별하는 나라에서나 있을수 있는 전근대적인 사고의 결과였다. 

전투부대 배치에서 제외된 미국의 미군 흑인병사들은 2차대전때 전투병력을 지원하는 지원부대로

편성되여 주로 군수물자 보급이나 비전투임무인 잡역부로 투입되였다. 좋은예로, 패턴장군의 당번병이

흑인이었다는 사실을 패턴장군 영화를 본사람들은 누구나 기억할것이다.

 

 2차대전때 미군은  백인부대, 흑인부대, 일본군 2세로 구성된 부대로 편성되여 유럽전선에 투입되였다

.2차대전중 유럽전선 발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미육군 대령으로 은퇴한 한국동포2세 김용옥 미육군대령이

소속된 부대가 일본인 2세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2차대전중 유럽전선에서 전투가 치열해지고  백인병사들의 사상자가 급증하자 흑인은

전투에 집접투입되지 않아 사상자가 거의 없다는 다는  현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미군당국은 

흑인병사들을 향해 전투병과 지원자에 한해 전투부대 배속을 허락했으나, 흑인은 전투를 하지

못한다고 흑인을 비하 했다가, 흑인병력이 필요해지자 흑인의 전투부대 편입을 허용한 처사를 보고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흑인병사는 별로 없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트루만 대통령은 1948년 7월 28일 군대내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

9981호로 군대내 백인과 흑인, 황인종 부대로 편성된 미군은 단일 부대로 재편성되여 1950년

한국전에 참전했다.

  

1960년대 말 이민을 온 이군발이는 70년에 미군에 입대해 50년대와 60년대초의 인종차별이 심할때

이민을 오지 않아서 버스타면 버스 뒷자석에 앉거나, 목이말라 물 마시려고 할때 과연 어느쪽에

물을 말셔야 될지를 망설여야 되는  차별을 당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50년대 이민와서 그런 인종 차별을 격었다면 아마 그건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가난을 면하기 위해

이민을 와서 그런 인종 차별을 받았다면 아마 그건 자존심과 빵을 바꾸는 비굴한 행위였다고

땅을 치며 후회하면서 아마 수많은 날들을 통한속에서 보내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겟다는

생각을 수도없이 햇을지도 모른다.

 

1903년에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를 거처 미본토로 이주했었든 동포들이

큰꿈을 앉고 도착한 새로운 나라에서 그들이 격었을 고초를 백년이 자나서 조금이나마 짐작할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심햇든 미국의 인종차별은  1955년 12월 1일, Rosa Parks 이라는 흑인여인이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내 버스에서  버스 뒷좌석에 타기를 거부하고 백인들이 타는 앞좌석에 앉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사건은 긴재판끝에 1956년 11월 13일 미연방대법원은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의

 흑인 차별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흑인들의 무저항 민권운동이 시작되 마틴 루터 킹박사의

주도로 유색인종 민권운동이 성공했어도  흑인에 대한 조직적인 차별은  주를 건너 운행하는 장거리 버스

정거장에서 계속되다가 60년대 초반을 넘어서 남부제주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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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여인 Rosa parks가 버스 뒷좌석에 앉기를 거부하고 백인이 앉는 앞좌셕에 앉았다가 경찰에

체포 되였든 버스는 흑인인권운동의 역사적인 기념물로 지정되여 전시되고 있다.

 

자료출처

미군자료-역사다큐

사진자료-구글